하나님의 세상 창조는 성경의 첫머리를 선포적으로 장식하고 있다. 그 세상 창조의 백미는 단연 인간 창조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 중에서도 인간 창조는 단연 돋보이고, 특이하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드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과 인간간의 관계는 다른 피조물과는 다른 특별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을 통하여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계획을 구체화하셨다. 즉 그의 후손을 통해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려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사랑의 정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최고의 계명은 바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다. 이것은 십계명을 비롯한 모든 율법의 최종적 집약이 되는 것이다.
1. 이해의 사랑
이해란 말은 영어로 언더스탠드(understan
d)이다. ‘밑에 선다’라는 말이다. 친히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되시고 인간의 모든 약함을 다 체험하셨다. 우리와 같이 한결같이 시험도 받으셨다.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신 것은 우리를 향한 이해의 사랑의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 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이해의 사랑을 보여 주셨으므로 이런 사랑을 받은 우리도 세상과 다른 사람을 늘 이해해주는 사랑을 보여 주어야 하겠다.
2. 무조건적 사랑
주님께서 비유하신 말씀 중에 탕자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 중의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고, 멀리 떠났다. 거지가 되어 어려운 처지에 들어서서야 이 나쁜 아들이 잘못을 깨달았다. 그리고 아버지께로 돌아와서는 아들이라고 할 수 없으니 자신을 일군으로 써달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아버지는 아들의 잘잘못을 꼼꼼히 따지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에게 두말이 필요없는 죄인이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아들을 무조건 용납하였다.
우리 역시 하나님 앞에 부족한 것 밖에 없는 사람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무조건 용납해 주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이다.
3. 용서의 사랑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로마 군병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고 예수님의 옷을 제비뽑아 나누어 가졌다. 이 순간 예수님은 너무도 나약해 보이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고, 조롱하며, 희롱하는 그들을 위해 “그들이 모르고 하는 일이니 용서해 달라”고 간구하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이 궁지에 몰리셨을 때, 주님을 저버리고 자신의 목숨을 위해서 도망가 버렸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그들을 찾아가셔서 다시금 자신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셨다. 용서하신다는 것이다. 자신을 사랑하면 다 용서하겠다는 것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이렇게 용서로 나타났다. 하나님의 용서라는 사랑을 우리도 다 받았다. 무한대로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마땅히 용서해야 할 것이다.
4. 희생적 사랑
무죄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 때문에 희생을 당하셨다. 그 희생도 자원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태어나신 것도 이렇게 희생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사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굴욕적인 것이요, 멸시와 천대의 상징이다. 저주의 상징이다. 그러나 바로 그 십자가를 예수님은 기쁨으로 감당하셨다. 바로 우리를 위해서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것은 행복이다. 부모님이 자녀를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하는 것은 바로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 희생을 자원하신 것은 바로 우리를 향한 사랑이 말과 혀 만의 사랑이 아니라, 진짜 사랑인 것을 증명해 보여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여 말뿐인 사랑을 하시지 않으셨다. 우리가 이의를 제시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하고, 확실한 사랑을 보여 주셨다. 바로 여러분과 나를 위해서 말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우리의 이웃을 이렇게 사랑하는 성도가 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