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매일 엄청난 숫자의 죽음과 마주치며 살아간다. 저녁 9시 뉴스는 우리에게 강도를 당한 사람, 테러로 희생된 사람, 사고로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죽음에 관한 소식들을 전해준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죽음을 많이 접하면서 나의 죽음에 대해선 말하거나 생각하기를 주저한다. 죽음은 우리에게 금기처럼 여겨져 있다. 우리는 자신이 영원히 살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꽤 오랫동안 살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가운데 삶의 계획을 세우고 오늘의 일과를 수행한다.
왜 우리는 죽음을 회피하고 있을까? 그것은 우리의 문화적 분위기 때문이다. 우리의 문화는 죽음을 애써 피하면서 하루하루의 웰빙(well-being)에 주목하도록 현혹시키고 있다. 기본적으로 인간의 삶은 기저귀와 수의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 우리는 먹고 배설하면서 살아야 하고, 마지막엔 수의에 둘러싸여 세상을 떠나야 한다. 우리의 삶은 기저귀와 수의의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삶의 마지막 출구를 보고 있는가
오늘의 문화적 분위기는 수의보다 기저귀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먹고 마시며 배설하는 삶의 순환 속에서 전개되고 있다. 우리의 삶은 욕망의 순환 속에 움직이고 있다. 우리는 건강과 웰빙을 강조하는 문화 속에 살고 있다. 이 땅에서 천년 만년 살 것 같은 착각 속에서 우리는 죽음의 현실을 애써 외면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웰빙의 문제뿐 아니라 웰다잉(well-dying)의 문제도 생각해야 한다. 기저귀 문화 속에 사로잡힌 자신에게 수의를 입혀보는 성찰이 필요하다. 그래서 삶의 겸허와 진정한 생의 가치를 다시 붙들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욕망의 무한궤도 위에서 끊임없이 보채는 현대인들이 지금 필요로 하는 것은 잃어버린 수의를 다시 꺼내어 입어보는 일이다.
「마지막을 생각하면서 살기」(Living With an End in Mind)의 저자 에린 크램프도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살았던 사람이다. 하지만 이제 그는 달라졌다. 왜냐하면 그가 암 선고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 후로 크램프의 생각은 바뀌었다. 그는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으며, 그것이 삶을 풍성하게 살아가는 비밀임을 깨닫게 되었다. 크램프는 죽음의 빛 속에서 삶을 가꾸는 법을 깨닫게 되었다. 그에 따르면, 우리의 당면한 질문은 “내가 내일 무엇을 할 것이냐?”가 아니라 “나는 지금과 죽기 전 사이에 무엇을 할 것이냐?”가 돼야 한다.
죽음은 반드시 찾아오는 사건이다. 죽음이 방문하지 못하는 나라는 없으며, 어느 누구도 죽음에서 면제되지 않는다. 죽음에 대한 준비는 선택 과목이 아니라 필수 과목이다. 죽음의 소식은 갑작스럽다. 하지만 죽음은 이미 나의 곁에 있다. 우리가 보지 않고 있을 뿐이다. 오늘도 죽음은 우리를 향해 오고 있다. 우리가 외면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죽음을 정면으로 응시해야 한다. 우리가 미리 죽음을 준비할 때 우리는 삶의 마지막 출구를 더 잘 걸을 수 있을 것이며,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순간을 더 아름답게 가꿀 수 있을 것이다.
죽음에 대한 성찰은 우리의 삶을 고양시킬 수 있다. 죽음 자체는 나의 생명에 마침표를 찍는 것이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깨달음은 나의 삶을 업그레이드해 줄 수 있다. 「크리스마스 캐럴」에서 스크루우지 영감이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죽음의 현실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죽음 자체는 사람을 죽이지만, 죽음에 대한 깨달음은 삶을 고양시키고 새롭게 한다.
죽음의 준비를 삶의 우선 순위 재점검 기회로
나의 삶이 끝날 것이라는 사실이 반드시 염세적이고 허무적인 생각만을 낳는 것은 아니다. 에이브러햄 매슬로는 죽음과의 만남에서 얻게 된 깨달음을 고백한다. “죽음과의 만남이야말로 모든 것을 아름답고 거룩하며 귀중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죽음을 맛본 후 나는 삶을 더욱 정열적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죽음의 준비는 오늘과 시간에 대한 우리의 감각과 감사를 새롭게 할 수 있다. 시간은 나의 것이 아니다. 미래도 나의 소유가 아니다. 나의 시간을 단 1분 1초도 만들지 못하며, 연장시킬 수도 없다. 시간은 언제나 순간의 모습으로 나에게 선물처럼 주어질 뿐이다. 내게 미래는 주어지지 않은 선물이다. 지금 나의 손 안에 있는 한 시간만이 나의 것일 뿐이다. 죽음에 대한 성찰은 우리로 하여금 지금 내 앞에 있는 한 시간을 사랑하도록 요청한다.
죽음에 대한 준비는 삶의 우선 순위를 새롭게 할 수 있다. 에린 크램프는 예전에 자신이 곧 죽게 된다면, 1년간의 세계 일주 여행을 하겠다고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크램프는 정작 자신의 암 소식을 듣고 죽음에 직면했을 때 실제로 그가 선택한 것은 여행이 아니었다. 크램프가 선택한 삶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 만일 사람들이 10분 뒤에 세상을 떠날 것임을 알게 된다면 대부분 전화를 걸어서 상대방에게 “실은 내가 너를 사랑했다”고 고백할 것이다.
「질문의 책」이 있다. 이 책에 많은 질문들만이 기록돼 있다. 한 면에 한두 개의 질문이 있을 뿐이다. 예를 들면 “만일 당신이 10분 뒤에 세상을 떠날 것임을 알게 된다면 무엇을 하겠는가?”라는 질문이 있다. 그리고 중간에 긴 여백이 있다. 그 면의 하단에 또 다른 질문이 있다. “그런데 왜 당신은 지금 그 일을 하지 않는가?”
죽음은 나의 삶의 기초에 대해 성찰하게 만든다. 죽음은 개별적으로 찾아온다. 죽음 앞에서 우리는 철저히 고독한 존재가 된다. 죽음은 우리와 가장 가까운 가족조차 남남으로 만든다. 죽음이 나의 문을 노크할 때 나의 일, 업적, 꿈, 프로젝트들은 모두 포말(泡沫)처럼 부서지고 만다. 무엇이, 아니 누가 나의 삶의 진정한 기초가 될 수 있는가? 인간의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은 나로 하여금 나의 인생을 어디에 둘 것인가를 진지하게 성찰하도록 요구한다.
삶을 건강케 하는 작은 투자도 아끼지 말아야
죽음 앞에서 우리는 삶의 기초에 대한 물음에 직면하게 된다. 우리가 일생을 바쳐 추구해 온 것들이 죽음의 현실을 버텨낼 수 있는 견고한 것들인가? 재산, 지위, 명예, 업적 등이 삶의 기초가 될 수 있을까? 우리가 삶에서 추구하는 것들은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좋은 재료들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들이 우리 삶의 절대적 기초가 될 수 있을까? 죽음의 문제는 우리를 절대자 앞에 단독으로 서도록 만든다.
시간을 내어 나의 삶의 마지막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자. 시험을 치를 때 마감 시간이 있음을 아는 것은 도움이 된다. 마감 종이 울릴 시간을 생각하면서 문제를 풀어나갈 때 인생의 지혜가 얻어질 수 있다.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전 7:4). 죽음에 대한 성찰은 삶의 작은 흐름들을 걸러주고, 인생의 큰 흐름을 잡아낼 수 있는 좋은 필터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