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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한 고요함 속에 담긴 순교의 아픔
2005-02-06 16:44:34   read : 1037


전북 정읍시 소성면 두암마을, 단풍으로 유명한 내장산이 있는 이곳에서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었던 교회가 하나 있다. 바로 두암교회. 지금은 한적한 농촌 들판 가운데 고요하게 서 있지만 50여년 전 이곳에서는 23명이 거룩한 피를 흘려야만 했다.

이곳은 일제 시대에 복음이 전해졌다. 당시에는 이 마을에 교회가 없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15리나 떨어진 마을에 있는 교회에 다녔다고 한다. 그러다가 해방 후 조요섭 선교사의 지원을 받은 김용은 전도사(현 군산중동성결교회 원로목사)가 1949년 1월 7일 그의 모친 윤임례 집사 가정을 중심으로 교회를 세웠다.

이들은 단촐한 기와집에서 성도들과 함게 모여 기도하는 등 신앙의 싹을 틔워 나갔다. 특히 아들 김용은의 전도로 예수를 믿게 된 윤임례 집사의 헌신적인 사역으로, 당시 두암마을 31가구 모두가 예수에 관심을 갖는 등 두암마을은 예수 믿는 마을로 변화되어 갔다.

그러던 중 김용은 전도사는 평양 출신 임동선 전도사를 초청해 부흥집회를 가졌다. 평양에서 공산주의를 접했던 임 전도사는 공산주의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며 이날 집회에서도 비판적인 내용을 말했다. 그리고 1년 후인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공산군들에 고문 당하면서도 끝까지 교회 지켜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정읍에도 공산군이 들어오게 되었다. 이들 공산군들은 두암마을 주변에서 수시로 반공세력과 총격전을 벌이는 등 두암마을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특히 두암교회 성도들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공산군들에게 눈엣 가시로 여겨졌다.

공산군들은 이 두암교회 성도들이 1년 전 임 전도사로부터 반공강연을 들었음을 알아내고 임 전도사를 초청했던 김용은 전도사를 잡기 위해 가족과 성도들을 위협했다.

또한, 악도들은 윤임례를 죽이기 위해 마당으로 몰려와 윤 집사를 향해 “동네 사람들에게 밤낮 없이 예수 믿으라고 귀찮게 하며, 기도하라고 농민들을 괴롭힌 반동분자는 마땅히 죽어야 한다”고 사람들 앞에서 협박과 회유를 했다.

하지만 윤 집사를 비롯한 성도들은 이러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았고, 끌려가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교회를 지켰다.

나는 죽어서 천국 가는데.. 기도 하다 죽음 맞아

1950년 9월 하순부터 공산주의자들의 탄압은 더욱 거세졌다. 10월 19일 공산군들은 윤 집사와 그 가족 등 두암교회 성도를 몰살시킬 뜻을 갖고 몰려왔다. 몽둥이와 식칼을 든 이들은 성도들과 아이들을 개 패듯 했고 아이들의 울부짓는 소리는 마을 밖까지 들릴 정도였다고 한다. 결국 몽둥이와 칼부림 속에 윤집사와 아이들은 모두 순교했고 공산군들은 방 안에 짚을 집어넣고 교회와 성도들의 집 4채에 모두 불을 질렀다.

이날 학살로 윤 집사와 둘째 아들 김용채 집사, 며느리 조선환 집사 등 일가족이 학살됐으며 정읍농고 학생회장이던 김용술씨와 그의 가족, 김용은 전도사의 친구 박호준씨 등 23명이 학살 전후로 순교를 당했다.

윤 집사는 순교 전 자신의 마지막을 느꼈을 때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를 찬송한 후, “나는 죽어서 천당에 가는데 당신들도 예수 믿기를 바라오”라는 유언 아닌 복음을 전파한 후, 그가 세운 두암교회당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중에 칼을 맞고 쓰러졌다.

오늘날 그 신앙과 성품을 이어받은 자손들은 그의 뒤를 따르는 신앙의 살을 살아가고 있다. 이중 목회에 생애를 바쳐 헌신한 사역자들이 22명이나 된다.

순교 위에 싹튼 새로운 신앙의 싹

순교의 사건이 있은 후 두암교회는 쉽게 복구되지 못했다. 전쟁으로 교회가 불타고 성도들이 대부분 죽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64년 두암마을 출신인 김태곤 전도사가 고향집에서 주일학교를 열면서 두암교회는 재건됐다.


66년에는 교회를 새로 건축하고 가매장했던 23명의 순고자들의 무덤을 교회 동산으로 이장해 ‘순교자의 묘’로 합장했다. 또한 매년 10월 중순 순교자 합동추모예배를 드리고 있다.

1977년 순교정신을 기리기 위해 순교기념탑을 세웠으며 순교기념 교회당과 교단 차원의 순교기념탑도 1994년에 세워졌다. 이 순교기념탑과 순교기념 교회당 위에 새롭게 신앙의 싹이 자라나고 있는 것이다.

두암마을은 이 23명의 순교 이후에도 공산군들에게 많은 괴로움을 당했다. 공산군들은 휴전이 된 후에도 산 속 깊이 숨어 있으면서 밤마다 마을로 내려와 곡식을 가져 갔고 사람들을 창으로 찌르며 잔인한 짓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은 두암교회는 순교자들의 붉은 피가 벽돌이 되어 들판 가운데 서 있다. 이젠 더이상 그런 아픔이 없기를 바라며 저 멀리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듯 평화로운 모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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