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새벽을 깨우는 사람이 돼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새벽에 기도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닮아간다는 것은 예수님의 인격뿐 아니라, 예수님의 삶 전체를 닮아 가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았다.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을 배우고, 스승의 정신과 삶을 본받는 사람이다. 스승이 명하는 훈련을 기쁘게 감수하는 사람이다.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위대한 스승이 되신다. 하나님이신 예수님도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셨다면, 유한한 인간인 우리들은 말할 것도 없이 새벽에 일어나 기도해야 한다. 새벽에 기도하신 예수님의 생애를 묵상해 보면, 새벽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거듭 깨닫게 된다.
침묵하는 시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예수님은 새벽에 일어나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을 들으셨다. 사람의 음성을 듣기 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셨다. 하나님의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음성을 따라 움직이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홀로 있는 시간을 가지셨다. 그 시간이 바로 새벽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원하는 사람은 침묵할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음성은 고요한 시간에 들린다. 침묵하는 시간에 들린다. 새벽은 침묵의 시간이다. 침묵으로 들어가기 위해 우리는 고독이라는 문을 통과해야 한다. 고독이 없는 침묵은 없다.
진정한 침묵은 외적 침묵이 아니다. 외적으로 말을 하지 않는 것만이 침묵이 아니다. 아무리 말을 하지 않아도 내면에 많은 말을 담고 있다면, 침묵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침묵은 내적 침묵을 의미한다. 내적 침묵이란 내면의 언어를 잠재우는 것이다. 내면의 언어를 잠재우는 침묵으로 들어가는 문이 고독이다. 새벽을 깨운다는 것은 고독을 배양하는 일이다. 헨리 나우웬은 “고독은 하나님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용광로”라고 말했다. 영성 생활에서, 고독을 배양하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변화와 성숙의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너무 중요한 일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홀로 고독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 새벽을 깨운다. 영적 거인은 하나님 앞에 홀로 설 줄 아는 사람이다. 사자가 홀로 사냥하고 독수리가 홀로 나는 것처럼, 영적 거인의 삶을 살기로 갈망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홀로 설 줄 알아야 한다. 그런 영적 거인만이 영적 전쟁에서 강력한 그리스도의 군사가 될 수 있다.
가까이 있으면 깊이 알게 된다
예수님은 새벽에 일어나 하나님 아버지와 친밀한 교제를 나누셨다. 새벽을 깨우는 사람은 새벽 기도를 통해 많은 유익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유익 때문에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가 새벽을 깨우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의 시간을 갖기 위해서다.
친밀한 교제는 원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선택하고 결단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깊은 교제에 들어가기 위해선 방해받지 않는 장소,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깊은 교제를 나누기 위해선 집중된 관심과 에너지가 필요하다. 깊은 교제는 결코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 친밀하고 깊은 교제는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 우리가 새벽을 깨워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다. 하나님을 앙망하기 위해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정말 원하시는 것은 큰 성취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애를 성취로 평가하시지 않는다. 성실함으로 평가하신다. 우리 내면의 동기로 평가하신다. 우리 삶의 열매로 평가하신다. 어느 정도 성취는 하나님 없이 인간의 노력과 실력으로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없이 맺을 수 없다. 하나님이 참으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깊은 교제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하나님은 많은 제물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원하신다(호 6:6).
우리가 친밀한 교제를 나눠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속에 들어갈 때 하나님께서 영향을 받으실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가장 가까이 있는 책, 가장 가까이 하는 사람에게 가장 많은 영향력을 받게 된다.
입맞춤은 멀리 있으면 불가능하다. 입 맞추는 친밀한 사랑을 원한다면 아주 가까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과의 거룩한 입맞춤은 가까이서 친밀한 교제를 나눌 때만 가능하다. 친밀한 교제를 나눌 때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보여주신다(요 15:15). 그리스도인의 영광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을 이뤄 드리는 데 있다. 새벽은 바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의 시간이요, 거룩한 입맞춤을 통해 거룩한 애정을 나누는 시간이다.
사명을 따라 살게 된다
예수님은 새벽에 일어나 사명을 재확인하셨다. 마가복음 1장에 보면,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는 것을 보게 된다. 그때 예수님은 사람들의 인기를 좇아 행동하시지 않고, 전도하러 가까운 마을로 가신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부르심을 따라 사시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의 부름을 따라 사셨다. 예수님은 사명을 따라 사셨다.
인간은 인기를 따라 살 때 그 영혼이 황폐해진다. 인기는 꽃과 같은 것이다. 꽃이 시들고 나면 꽃의 향기는 냄새로 추락하고 만다. 우리는 인기가 아닌 사명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인기가 아닌 인격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인기는 내면을 공허하게 만들지만, 예수님을 닮은 인격은 우리의 내면을 충만하게 한다. 새벽은 인기에 함몰돼 가는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고 인격을 새롭게 하는 시간이다.
예수님은 새벽에 일어나 마음의 정원을 가꾸는 시간을 가지셨다. 예수님의 생애가 아름다운 것은, 예수님의 마음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마음은 긍휼로 가득하다. 하나님의 사람의 위기는 차가워진 마음에서 온다. 냉정한 마음처럼 무서운 것은 없다. 냉정한 마음은 사람의 영혼을 질식시킨다. 영혼을 살리는 마음은 따뜻하다. 부드러운 마음이다. 겸손한 마음이다. 예수님의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하셨다. 그런 까닭에 사람들은 예수님의 품에 안겨 안식할 수 있다.
새벽은 우리의 마음을 가꾸는 시간이다. 차가워진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따뜻하게 데우는 시간이다. 딱딱해진 마음을 부드럽게 하는 시간이다. 미움과 이기심과 정죄로 가득 찬 마음을 회개함으로써 비우는 시간이다. 교만한 마음을 겸손하게 만드는 시간이다.
자신을 다스릴 수 있게 된다
예수님은 새벽 시간에 하늘로부터 임하는 지혜를 얻으셨다. 지혜는 분별력이다. 때를 분별하고 영의 세계를 분별하며, 사람을 분별하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은 너무 소중한 지혜이다. 참된 지혜는 하늘로부터 임한다.
내게 있어 새벽은 하나님의 지혜를 얻는 시간이다. 새벽 기도를 드리는 시간에 나는 부르짖는 기도를 마치고 침묵의 기도 속으로 들어간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지혜를 얻게 된다.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얻게 된다. 고민하고 있는 문제의 해결책을 얻게 된다. 새벽 기도를 통해 얻게 된 지혜와 총명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로 얻게 된 선물이다.
하나님의 지혜를 얻게 되면, 어떤 사람이 일평생에 걸쳐 이룰 수 있는 일을 아주 짧은 시간에도 이룰 수 있다. 새벽에 드리는 침묵 기도를 통해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설교를 받기도 하고, 책을 쓸 수 있는 글을 받기도 한다. 구체적인 교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받기도 한다.
예수님은 새벽 시간에 하늘로부터 임하는 능력을 받으셨다. 하나님의 일을 육신의 힘이 아닌 성령의 능력으로 해야 한다. 모세가 육신의 힘으로 한 것은 애굽 사람, 한 사람을 쳐 죽인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가 성령의 능력을 받았을 때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일을 이루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켰고, 광야에서 기적의 사람이 되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약하게 태어났다. 그래서 더 많은 육체의 한계를 느끼며 살고 있다. 그러나 새벽 기도 때마다 무력한 육체를 안고, 하나님께 나아가 조용히 하나님을 앙망하면 하나님께서 놀라운 능력을 부어주시곤 한다(사 40:31). 새벽 기도는 육체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수단이다.
예수님은 새벽을 통해 자신을 정복하셨다. 세상을 정복하기 원하는 사람은 자신을 정복해야 한다. 자신을 정복하기 원하는 사람은 시간을 정복해야 한다. 시간을 정복하는 것은 게으름을 정복하는 것이다. 시간을 정복하기 위해선 새벽을 정복해야 한다. 하나님은 게으른 사람을 싫어하신다. 대부분의 죄는 게으름과 조급함에서 나온다. 게으름과 조급함을 정복하는 것은 새벽을 깨우는 사람이 되는 길이다.
새벽을 정복하는 사람은 자신을 정복할 수 있다. 자신의 잘못된 감정을 다스리고 분노를 다스리며, 게으름을 다스리는 힘은 새벽을 정복하는 데 있다. 나는 살아갈수록 가장 다루기 힘든 대상이 자신임을 깨닫는다. 쉽게 포기하는 나, 쉽게 절망하는 나, 쉽게 나태 속에 빠지는 나를 이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날마다 새벽을 깨우는 삶을 살 때 하나님은 나를 이길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나를 이길 수 있도록 도와주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개발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자유케 하는 훈련이 된다
내가 새벽을 깨우며 배양한 성품은 성실함에 있다. 성실함은 지속성이며 일관성 있는 삶의 모습이다. 지속성과 일관성에서 인내가 나온다. 인내는 인생을 승리하는 가장 성숙한 성품이다. 인내가 없이는 어떤 사람도 탁월함에 이를 수 없다. 인내가 없이는 깊은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인내가 없이 자기를 개발할 수도, 자기를 초월할 수도 없다.
새벽을 깨우는 영적 훈련은 결코 고통스런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를 자유케 하는 훈련이다. 새벽을 깨우는 삶은 하나님과 깊은 사랑 속에 사는 것이다. 새벽을 깨우는 삶은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 가는 것이다. 새벽을 깨우는 삶은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을 얻는 것이다. 새벽을 깨우는 삶은 거룩한 습관을 형성하는 것이다. 자신을 정복하고, 자신을 초월할 수 있는 것이다. 새벽을 깨우는 삶은 기술과 방법에 능함에서 오는 게 아니다. 오히려 탁월한 원리와 인격에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