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 낙원인 에덴 동산에서 살던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여 쫓겨난 것은 사단이 인간의 교만을 자극시켜 그 유혹에 빠져 하나님을 배신하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와는 뱀의 말을 듣고 하나님과 같이 되어 보겠다는 교만의 마음이 생겨서 하나님께만 의존했던 관계를 깨뜨린 것이다. 그리하여 사단의 독약인 교만으로 인하여 인간이 누려야 할 영원한 행복이 무참하게 파괴되었다. 그러므로 인간의 저주와 불행은 이 교만에서 생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교만이 인간을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게 했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렸고 인간의 마음의 평안을 앗아갔다.
사단이 심어준 이 교만이 오늘 이 세상 도처에서 인간들을 시기, 질투, 갈등, 파괴, 단절, 적대 등의 문제의 늪에 빠져들게 했다. 인간을 끊임없이 쓰러뜨리는 그 마음의 핵에는 바로 교만이 숨어 있다고 볼 수 있으며 인간이 범하는 모든 죄의 뿌리는 교만에서 찾을 수 있다.
사단의 교만적 특성에 대해서는 이사야 14장 12∼15절에 잘 묘사되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다(사 14:12-15)." 여기서 교만한 존재이며 인간을 쓰러뜨리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우리말의 교만(驕慢)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의 (까아),(가바흐),(룸) 등이 번역된 말인데 그 뜻은 대개 '우쭐대다' '자기를 높이다'는 의미이다. 또 헬라어의 (휴페레파니아),(알라조네이아) 등이 '오만' '교만'이라는 용어로 사용되고 (튜포오),(퓨시오) 등은 '부풀다' '자고하다' '연막치다' '우쭐대다' '자랑스럽게 여기다'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영어성경에서 교만을 나타내는 단어는 'pride(자만)' 'haughtiness(건방짐)' 'elegance' 'arrogance(거만)' 'loftiness(자고)' 'boasting(자랑)' 등으로 사용되며 우리말 번역에서는 대부분 교만으로 옮겨지고 있다. 국어사전에서 교만은 "잘난 체하여 뽐내고 버릇이 없음. 거만" 또는 "젠체하고 뽐내며 방자함"이라고 했는데 "방자하다"는 말의 뜻은 우리말 사전에서 보면 '주제넘다' '건방지다' 등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 본대로 교만은 일반적으로 자기의 부족한 점을 알지 못하고 자기 자신을 높혀 대단하고 훌륭한 존재라고 여기는 마음의 상태이다. 여기서 자기를 높인다는 것은 더 구체적으로는 무절제적이고 불합리한 자기 존중이라고 할 수 있으며 지나친 '자기애(narcism)'와 같은 개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성경은 교만에 대해 좋지 않은 개념으로서 이에 대하여 교훈을 주는 대표적인 성경은 잠언 16장 18절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거만한 자의 교만을 낮추신다(욥 22:29)." "여호와는 교만한 자의 집을 허시고....(잠 15:25)," "교만히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신다(시 31:23)." 로마서 12장 16절에도 "서로 마음을 같이하여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있는 체 말라."고 말씀했다. 성경은 인간의 주제 넘음과 자찬을 전적으로 반대하고 있으며 이를 죄로 인식하고 지적하고 있다. 곧 자신이 성취할 수 있는 이상의 자랑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다(왕상 20:11, 잠 25:14).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교만은 버리고 피하며 물리쳐야 할 심리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성경에서 교만과 자랑은 악한 자의 특징으로 분류하고 있다. 교만은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에게 임하는 은혜를 막아버리며 영적으로 우리를 성장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무서운 적이다. 그러니 일종의 영적 장애자가 되는 것이며 영적 어린아이와 같이 되는 것이다. 최근 유행어처럼 빈번하게 사용되는 이른바 '성인 아이(adult child)"는 교만으로 인하여 초래된 결과일 수도 있다. 몸은 성인이지만 영적으로는 성장, 성숙하지 못하여 어린아이의 상태에 고착된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다. Thomas A Kempis(토마스 아켐피스)도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에서 "자신의 겸손을 고백하기 전에는 당신의 영적 생활에 커다란 진보를 절대로 가져올 수 없다."고 주장한 바 있다.
정신적으로 교만은 사람을 매우 긴장하게 하고, 피곤하게 하는 요인이 된다. 자신을 어떤 면으로든 내세우지 못해서 못견뎌하는 것은 많은 정신적인 에너지가 소모되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든지 본능적으로 자신을 내세우고자 한다. 이 본능을 억제하고 겸손하게 된다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 자신이 배운 것, 자신이 이루어 놓은 것, 자신의 명예 등 자신의 것이 자주 의식되어 표출되려고 한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즉 우리의 머리가 무겁지만 이것이 무겁다고 의식이 된다면 정상이 아니다. 물론 우리 신체에서 머리는 대단히 무거운 부분이지만 목이 잘 받들고 있기 때문에 무거움을 모르고 사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목이 느끼기에 머리를 받치는 것이 너무 무겁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목 디스크 증세이거나 잠을 잘못 자서 목의 근육이나 신경이 잘못된 것이다. 또 정상적인 사람은 무거운 팔이 몸에 붙어 있는지 알지 못하고 사는데, 팔이 붙어 있다는 것이 인식되면 그것은 비정상이다. 전날 잠잘 때, 팔이 눌려서 잔 것이든지 팔에 어떤 염증이 있다든지 정상이 아니기 때문에 자꾸 의식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무슨 일을 했을 때, 그것이 자꾸 의식되어지면 심리적으로 이상이 온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나 돈 많은데.... 나 반장했는데.... 나 계급 높은데.... 나 자랑할 것이 많은데.... 이것은 바로 교만의 증상이다. 이처럼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는 교만의 기저에는 틀림없이 열등의식이 숨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Afled Adler(알프레드 아들러)는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 열등감에 대한 보상을 위해서 의도적으로 우월감을 갈망하게 된다고 보았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부름받은 '자기'로서 살아가는 것이지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열등의식을 가질 필요도, 그렇다고 교만할 수 없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정신적, 신앙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Reinhold Niebuhr(라인홀드 니버)는 인간은 교만한 존재인데 인간이 갖는 교만에는 네 종류가 있다고 주장했다. 첫째는 지적인 교만이다. 배운 사람은 배운 것이 교만의 원인이 될 수 있다. 모르면 모르기 때문에 겸손하지만 배우면 알기 때문에 가만히 있기가 어려운 법이다. 둘째로는 영적인 교만이다. 영적으로 뭔가를 체험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교만해 있다. 셋째로는 권력적인 교만이다. 권력을 쥔 사람, 권력이 높은 사람은 상대적으로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서 교만한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넷째로는 도덕적 교만이다. 도덕적으로 비교적 깨끗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교만한 것이 일반적이다. 니버는 다섯 번째 교만으로 분류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집단적 교만에 대해서도 진술했다. 즉 인간은 어떤 집단에 속했는가에 따라서 자신의 위치가 달라진다고 생각하여 집단적 교만을 가지게 된다.
교만의 폐해는 분노이다. 사람이 교만하면 쉽게 분노하게 된다. 자신의 교만을 꺾는다든지 받아주지 않을 때는 쉽게 분노하게 되고, 아주 형편없는 사람이 되어 버린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분노의 저변에는 반드시 교만이 깔려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교만을 가지고 있으면 마음의 상처를 받기 쉽다. 교만한 사람은 늘 자신만만한 것 같고, 당당한 것 같고, 떳떳한 것 같고, 강한 것 같으나 가장 상처가 많은 사람이다. 그 상처가 위장되었을 뿐이다. 교만한 사람은 치료받기 전의 나아만 장군과 같은 사람이다. 겉모습은 훈장이 달려있고, 지체 높은 사람으로 보여지지만 겉으로 가려진 옷 속에는 병으로 썩어 냄새나고, 상처가 많은 사람이다. 교만은 큰 짐을 짊어진 것과 같아서 이것을 해결하지 않으면 밝고 명랑하게 살아갈 수가 없다. 사단은 우리를 교만의 노예가 되도록 하여 끌려 다니다가 결국 파멸에 이르도록 할 것이다. 사단은 본질적으로 교만한 존재이며 우리를 교만하게 하는 영(spirit)이므로 우리를 공격하여 교만하여 쓰러뜨리려는 것이 그의 임무이다.
어떤 목사님의 간증에서, 어느 날 설교를 마치고 내려오는데 그 날 따라 자신의 설교를 스스로 생각하더라도 은혜로왔다고 한다. 예배가 마쳐지고 교회 현관에서 교인들과 인사를 나누는데 한 여집사님이 "목사님, 오늘 설교 참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이렇게 인사를 하는 것이다. 목사님들은 대체로 교인들로부터 제일 듣기 좋은 말이 "목사님의 설교에서 은혜를 많이 받았다."는 말이다. 그러자 이 목사님은 이렇게 답변했다고 한다. "아이, 그렇지 않아도 설교마치니까, 마귀가 '너 오늘 설교 잘했다.'고 하더라구요!" 칭찬을 통해서 인간은 교만하게 될 수 있다. 또한 교만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이로 인해서 한 개인의 파멸은 물론 다른 사람에게도 피해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이나 사물을 무시하고 멸시한다는 것이다. 그 교만으로 인하여 상처받고 괴로워하는 피해자들이 주변에서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단은 잡식성이라 그 대상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교만하게 만들어 그들을 쓰러뜨리고 그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 교만으로 인한 아픔을 주어 서로의 관계를 깨뜨리며 마음을 아프게 만드는 전략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교만이 없는 곳은 아무 곳도 없을 정도로 마귀는 그 대상을 막론하고 우리의 마음 밭에 교만이라는 가라지를 심어놓아 신앙의 농사를 망치게 하는 놈이다. 그래서 결국 교만으로 우쭐거리다가 쓰러지는 것을 보고야 기뻐하는 악의 핵(core)이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는 한 번 자기 군대의 진영 시찰을 나갔다. 그는 이른 아침 간소한 산책복을 입고 캡을 쓰고 산책을 나섰다. 이리 저리 들러서 돌아오는 길에 한 곳에 오니 거기는 두 갈래 길이 있고 그 길가에 한 거만한 군인이 배를 내밀고 한 손에 담배를 피고 연기를 피우며 서 있었다. 황제는 그 앞에 가서 군대 예를 하고 길을 물었다. 그 군인은 아주 교만한 태도로 담배 연기를 내뿜으면서 담배 낀 손으로 한 쪽 길을 가리키며 "이리로 가!" 하고 반말을 썼다. 황제는 그 길로 두어 발자국을 옮기다가 그 군인의 거만한 태도에 흥미있어 다시 발 길을 돌리고 그 군인을 향하여 말했다. "당신 계급이 뭡니까?" 이 군인은 신이 나는 듯 거만하게 말했다. "자네 한 번 맞춰 보게나." "네 , 상사인가요?" "아니, 그 위야!" "그러면 소위입니까?" "아니, 그 위야! 난 대위란 말이야!" "대위님! 훌륭하십니다." 황제가 발을 돌이키려 할 때, 그 군인이 물었다. "자네는 계급이 뭔가?" "예, 이 번에는 대위님이 한 번 맞춰보시지요." "자네 일병인가?" "그 위입니다." "그러면 상병인가?" "아니오, 그보다는 한참 위입니다." "그러면 중위인가?" "아니, 그 위입니다." 이 때, 군인은 좀 당황하였다. "그러면 나와 동급이군, 대위인가?" "아니, 그보다 훨씬 위입니다." 군인의 거만했던 허리가 구부러지고 말소리가 점점 떨렸다. "그러면 당신은 ." "난 이 나라의 황제요!" 군인은 떨면서 무릎을 꿇고 황제에게 용서를 빌었다. "일어나거라. 너나 나나 한가지다. 이 천지만물을 지으신 하나님 앞에서는 대위이든, 황제이든 아무런 차이도 없다. 그러니, 우리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겸손하게 살도록 하자꾸나."
우리의 마음 속에 교만이 발생하게 되면 무엇보다도 그것을 인정하고 고백해야 한다. 지금 자신이 교만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모든 문제는 인정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모름지기 자신의 잘못과, 실수를, 부족함을 그대로 인정하고 고백할 줄 아는 것이 진정한 용기이며 겸손이다. 겹겹이 쌓여있는 거짓과 허영과 헛됨이 드러날까봐 전전긍긍하고 애써 부정하고, 감추고 사는 사람에게 무슨 진실이 있고 마음 편함이 있겠는가? 교만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상처받기가 매우 쉽다. 교만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교만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기보다는 겸손하려고 해야 한다. 스스로 교만하다는 사실을 발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비추어서 자신의 교만을 발견하고 겸손해야 한다. Bernard(버나드)는 "한 계단만 더 내려가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누가 자신을 욕할 때, 그것을 인정하고 오히려 한 계단 더 내려가면 여기서 겸손이 시작된다고 보았다. "야! 이 나쁜 놈아!"라고 누가 내게 욕을 하면 "나쁜 놈이라니요? 아닙니다! 저는 죽일 놈입니다." 라고 하면 더 할 욕이 없게 되는 것이다.
경건한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이 자신을 칭찬할 때, 그것이 사실이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가만히 듣고 있지만 말고 빨리 거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만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든지 자신의 마음 속에 자리잡으려고 하는 교만을 스스로 거부해야 한다. 거부하지 않으면 서서히 칭찬을 받아들이게 되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이 싹트게 된다.
교만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깨달아야 함(시 8:1-9)과 동시에 자신의 한계를 깨달아야 하며(왕상 9:6-14) 예수님의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빌 2:5-8). 그리고 겸손하게 되려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면서 교만을 물리쳐야 한다. "하나님! 제가 교만하게 되는 것을 원하시지 않으시지요? 제가 교만하지 않고 늘 겸손하게 주를 섬기기를 원하시지요?" 주님의 뜻을 물으면서 늘 겸손해지는 자신의 모습을 마음 속으로 그려야 한다. 교만에 압도되어 하루 하루를 살다보면 우리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모습이 흐려지고 그 음성도 점점 작아지게 된다. 아울러 성경에 기록된 바와 같이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벧전 5:8-9)."는 말씀대로 우리의 마음을 교만하게 하는 악한 영(evil Spirit)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대적해야 한다. 이것은 대단히 실제적인 것이어서 마귀를 대적할 때에 교만의 마음이 물러가게 될 것이다. "나를 교만하게 하는 영! 나는 그리스도의 평안과 겸손을 가질 권세가 있다. 이것을 앗아가는 영! 나를 교만하게 하여 쓰러뜨리려는 너의 궤계에 나는 빠지지 않을 것이다. 너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묶임을 받고 쫓겨날지어다!" 이와 같이 마음이 교만하게 될 때마다 외치고 선포하고 대적하면서 성령을 의지해야 한다. 이러한 논박과 대적이야말로 교만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성경적인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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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주의 양 주님만이 나의 목자
약하고 추하고
어리석은 인생이여
아브라함처럼
거짓말도
다윗처럼
간음도 살인도
삼손처럼 미혹도
엘리야처럼 낙심도
베드로처럼 부인도
도마처럼 의심도
일 삼고 있구나
말 한마디에 상처받고
환경때문에 넘어지고
질병때문에 괴로워하고
물질때문에 근심하는
연약한 존재여
내가 죄를 먹고
죄를 마시며
죄를 싸대는 공장이라니
참 어처구니가 없구나
당신의 품으로
나를 감싸 주시고
당신의 손길로
나를 돌봐 주소서
당신만이
나의 구세주입니다
인생이 임의로
오고 싶다고 오고
가고 싶다고
가는 것인가
내가 주를 살고
주를 위해 죽는 것을
죄와 타협하지 않는
강한 믿음을 주시고
주를 바라보고
그 뜻에 순종하며
내가 걸어야 할 길을
똑바로 걷게 하소서
이 생명 귀환하는 날까지
주의 강한 오른 손으로
약한 나를
강하게 붙들어 주소서
나는 주의 양이요
주님만이 나의 목자 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