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바로 보고 바로 읽자
2004-02-27 12:46:23 read : 3914
'야베스의 기도'와 'QT의 인간중심적 적용'의 위험에 대해서
성경은 믿음으로 읽고 해석해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혹은 이 원칙이 우리에게 주는 어감 자체에 대해 경솔하게 거부감을 가진다면, 결코 성경을 성경으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됩니다. 성경을 인간의 복리의 관점에서 읽는다든지, 매일 매일의 삶의 활력소로 받아들이는 것은 간혹 부차적인 수확이 될 수는 있을지 몰라도 본유적인 그 무엇이 될 수는 없습니다.
나는 소위 말하는 매일의 묵상이니 큐티(경건의 시간)니 '적용의 중요성'이니 하는 말들의 출발점을 거절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렇게 이름 붙은 많은 성경학습들이 사실은 '인간을 널리 복되게 하라. 하나님도 사실은 그 목적에 부합한 행위들을 하셨다. 이 얼마나 복되고 복된가'하는, 오랜 시간 가려져 있었으나 이제는 누구나 실제적으로는 부인할 수 없는 '탐욕'에 중심 축을 두고 있다는 것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아무런 목적과 요구 없이 대해야 합니다. 우리는 단순히 성경의 본의가 무엇인가부터 성경 묵상을 시작하여야 합니다. 부유하게 되면 무엇인가 새롭고 신선한 성경의 대목에 더 주의가 쏠리게 되고, 가난하면 성경의 '가난한 자'의 대목에 불필요한 강조를 하기도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성경을 자신의 오락거리나 생활의 보조제격인 비타민 정도로 취급하는 행위입니다.
성경, 아무런 목적 없이 대해야
성경을 완전히 신앙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외면적으로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서재에 꽂인 다른 서적보다 겨우 훌륭한 책 정도로 격하시키는 일들이 많이 발생하게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흠이 없는 말씀입니다.
문서설과 편집설을 어느 정도 들어 본 사람은 '성경은 100%다'라는 말이 석연치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제가 아내를 따라 꽤 오랜 기간 출석했던 한 장로교회에서는 신학교에서 "성경의 일부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배우고는 실제로 신실한 교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려고 하다 보니 혼란이 와, 문서설과 편집설 등을 아는 것이 마치 엘리트의 특권쯤으로 여기고 '미천한 맹신자들'(물론 그가 그렇게 표현하거나 실제로 자신이 그렇게 생각했던 것은 아닐지 몰라도, 결과적으로)에게는 부득이하게 성경의 무오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경이 조각난 여러 편린들을 모아 꿰매 만들어진 책이든, 아니면 인간의 사설이 개입되어 결국 인간들에 의해 정경이 설정된 것이든 간에, 나는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들을 계획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셨다는 것을 믿기에, 지금 내가 들고 있는 이 헬라어, 히브리어 성경, 아니 그것을 영문과 한국어로 번역한 성경이라도 하나님이 바로 인류에게 허락하신 정확하고 틀림없는 말씀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에게 상을 주시는 분인데, 나는 개인적으로 그 상 중에 가장 중요하고 큰 상이 바로 하나님의 의중의 심사를 헤아릴 수 있는 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각자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과연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것을 꺼리는지 알고 싶지 않습니까? 그 사랑하는 사람의 편지 속에 그 사람의 의중이 적혀있으니, 여러분들은 그 편지가 바로 그 사랑하는 사람의 편지라는 사실만을 신뢰하면 됩니다.
성경을 읽기 전에 무릎을 꿇고 부족한 자신의 믿음에 대한 회한의 기도를 드리는 것은, 바로 제가 성경의 디모데후서로부터 시작했던 성경을 새롭게 보기의 시점에 있어 행했던 비결이며, 바로 여러분들에게도 유용한 매우 성경적인 성경보기의 출발점입니다.
또 한 가지 마지막으로 소위 말하는 적용 문제에 대해 언급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우리의 삶이 변화되고 더욱 더 복되어지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은 일찍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가 그 분의 심중을 읽어 알아낸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본문을 통해 알아낸 이 정보는 어쩌면 우리가 성경을 읽는데 심각한 방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과정이 무시된, 남이 대신 만들어 놓은 말씀을 보고 '이것은 이런 뜻이야'라는 대범한 추정 속에, 마치 인스턴트 음식을 대하듯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소위 말하는 큐티 서적이라는 것도 단 시간 안에 얼마나 많은 분량을 뗄 수 있는가 하는 산술적, 혹은 경제적 마인드에 그 출발점이 있거나, 간편하게 성경을 묵상할 수 있다는 카피로 독자들을 끌어 모으고 있지만, 구약 성경, 특히 신명기 등에서 여러 번 밝히고 있는 것은 우리 개개인이 성경을 직접 읽고 생각하고, 그 다음에 다른 주해와 맞추어 보는 식이 아니면 그것은 결코 올바른 방식이 아니며, 성령께서도 인간의 선입견 때문에 제한적으로 역사하실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스턴트 음식 대하듯 하나님의 말씀 대해서야
이 말에 대해 성령을 사람이 제한할 수 있느냐 하고 반문하실지 모르지만 실제로 성령의 사역은 전능한 하나님의 사역이지만 사람으로 인해 그 사역이 얼마나 많이 제한되고 있는지는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오늘 나에게 이러이러한 말씀이 필요하다라고 말하는 것도 편협한 자기우상화의 발로입니다. 우선은 자신의 상황과 상관없이 매일 매일, 순간순간 그 진행 분량에 상관없이, 차례대로 성경 전권을 읽어가며 깊이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쩌면 한 구절을 가지고 한 달을 끌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자신의 성경 묵상에 관한 게으름 때문이 아니라면 그런 깊은 성경 묵상이야 말로 이 어두운 세상에 가장 필요하고 바른 성경묵상이 아닐까 합니다. 단언하건데 적용을 먼저 내세우지 마십시오.
항간에 서점과 출판사의 살을 찌우게 했던 '야베스의 기도'라는 서적에 제가 개인적으로 갖는 혐오는 바로 이러한 동기와 유사한 이유로 갖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조수나 우리의 요구를 무한이 들어 주시려고 존재하는 분이 아닙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영광 운운하면서도 이내 자신의 욕구와 그것의 충족을 지상 최대의 가치로 두고 있다는 것을, 자신도 속고 타인도 속인 채 그것이 가장 바른 성경의 은혜인양 치장하는 것은 최소한 다소의 시간이 흐른 뒤에 그 같은 서적인 폐지 창고에 버려진다는 것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에게 어떤 욕구가 있고, 그곳에 하나님을 가져다가 '구겨서' '억지로' 맞추어서는 안됩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 자체에서 우리가 생전 알지 못하는 신선한 젖을 구해내려는 갈급한 마음과 구별되는, 사심(私心)이자 욕심입니다.
이 양자의 차이가 미묘하기 때문에 우리는 되는대로 구별 없이 자기 편의 위주로 나아가는데, 물론 이를 어떤 계율의 의미로 강요하는 것은 아니지만 만일 우리가 '구별된 삶'을 살기로 결심하고 하나님께서 그런 마음을 우리에게 심어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우리의 가슴에서 떼어내 버려야 할지도 모릅니다.
성경은 믿음이 없이는 한 구절도 바르게 읽어낼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엄청난 보화가 언제나 샘솟듯이 하고 있습니다. 사심과 성경의 말씀을 가지고 어떻게 해보겠다는 마음을 내려놓기 위해 먼저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그 의미자체가 난해한 경우는 여러 해설서를 참고할 수 있지만, 그 모든 것에 앞서 성령님께 이 말씀을 깨닫게 해달라는 기도를 드리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어떤 이는 성경을 읽을 때는 반드시 어떤 편중된 관점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말하면서, 은근히 성령님을 의지하려는 기도를 폄하시키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럴지라도 이 시대의 여러 가치관과 인간의 관점을 뛰어넘는 범 세계, 범 우주적인 하나님의 관점과 시야를 읽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미국 대통령이 성경을 가지고 다른 나라를 '악의 축'이니 하는 이야기는 바로 인간의 사심과 해석이 하나님의 성경말씀의 바른 이해를 막게 된 경우입니다.
그들은 마치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이 하나님의 뜻 인양 크게 외치지만 인간의 해석과 관점은 언제고 바뀌게 됩니다. 제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많은 교회 목사님들도 공산주의를 사단과 마귀와 비교했습니다. 한국전쟁을 몸소 경험한 그분들에게 공산당이 마귀로 비춰졌을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그 때에도 시대가 우리의 성경을 보는 바른 관점을 방해하는 것을 물리치도록 더욱 강하게 기도했어야 했습니다.
어쩌면 성경을 일정 부분 곡해하는 것은 인간의 한계 때문에 벌어지는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우리의 자세는 언제나 하나님의 의중을 다소나마 읽어낼 수 있는데 가장 큰 가치와 목적을 두는 것이어야 하겠습니다.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이 묵상하고 닳도록 곱씹으며 읽고 있는 성경의 참 뜻을 당신에게 분명히 비춰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