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걷는 삶
2004-02-17 09:43:24

많은 사람들이 별 고생하지 않고 성공한 이들을 부러워합니다. 이른 나이에 관직에 등용되거나 학위를 딴 수재들, 혹은 부모를 잘 만나 호강하는 재벌 2세들이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물론 이들이 보통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이 거쳐야만 하는 삶의 지루한 중간 단계를 생략하고 단번에 어떤 위치에 오른 것은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한번 지나고 나면 다시는 되돌이킬 수 없는 것이 시간의 속성이라면, 그리고 삶의 절정이나 최고점보다는 삶의 총점이 더 중요한 것이라면, 삶의 중간단계를 훌쩍 뛰어넘어 단번에 정상에 서는 것이 긴 인생에서 언제나 축복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자주 해보게 됩니다. 그만큼 삶의 밑변이 좁아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무 가파른 삶이 되지는 않겠습니까? 급하게 경사진 산에는 나무들도 좀처럼 제 자리를 잡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등산객들도 오래 머무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왕 한 번 사는 인생이라면, 오히려 서두르지 않고 삶의 모든 길을 천천히 음미하며 걷는 것도 삶의 풍요함이라는 측면에서는 그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더구나 영원까지 이어진 우리들의 발걸음이기에 서두를 필요는 더더욱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천천히 걷는 이, 그래서 지나치기 쉬운 길가의 들꽃 같은 삶의 작은 부분을 소중히 여기는 이만이 진정으로 다른 사람과 어깨를 마주하며 그들의 애환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 때문에 하나님도 우리들을 분주한 삶의 여정에서 천천히 한 걸음씩 인도하시거나 잠깐씩 멈춰 서게 하시는지도 모릅니다. 크리스 형제에게, 편지 잘 받아보았습니다. 글월 곳곳에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어려운 감정들이 배어있었습니다. 아무래도 건강한 사람보다는 아픈 사람에게 편지하는 일이 더 어려우셨나 봅니다. 이토록 만신창이가 된 내 몸 보기가 안타까우셨나요! 하지만 친구여, 안심하십시오. 내 영혼은 여전히 맑습니다. 많이 웃으며 지내고 있고, 어느 때보다 더 하나님과 친구들 곁에 가까이 가 있음을 느낍니다. 갈비뼈가 다섯 대나 부러지고 비장을 제거하는 중상을 입었지만 이 사고는 오히려 은혜였습니다. 천천히 가라는, 친구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더 많이 기도하라는 권고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사람들을 진정으로 돌보신다고, 그래서 그것을 더 깊이 믿으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죽음의 경계선까지 갔습니다만 두렵지 않았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아직 나를 본향으로 부르지 않아 다소 실망스럽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압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직 내게 할 일을 남겨두셨던게지요. 그래서 아직 이렇게 잘 살아 있는 내가 진정 고맙고 기쁩니다. * 교통사고로 중상을 당한 후.... 친구에게 보낸 헨리 나웬의 편지에서* 크리스토퍼 드 빙크의 헨리 나웬(서울:IVP, 1999),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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