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 넷 째날 마가복음 14장 1-11절 2004-03-31 14:11:12 read : 5288
20040407 고난주간 넷 째날 마가복음 14장 1-11절
고난 주간 넷째 날 수요일은 '사랑과 배신의 날'이라고 부릅니다.
누구의 사랑을 받았습니까? 옥합을 깨뜨린 한 여인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 부분이 오늘 본문 3-9절까지의 내용입니다.
누구의 배신이 있었습니까? 가룟 유다의 배신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사랑 부분을 중점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종려주일에 화려하게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시면서
주님은 3일 동안 계속 예루살렘 성전에 계속 들어가셨습니다.
첫날에는 입성하시고 성전을 둘러보셨고,
둘째 날에는 성전에 들어가 성전청소를 하셨으며,
셋째 날에는 성전에 들어가 사람들과 변론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고난 주간 넷째 날만은 성전이 들어가지 않고 베다니에 머물러 계셨는데,
어디에 있었습니까?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3절을 보면 그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한 여자가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진정한 헌신이 무엇인지 가르쳐줍니다.
우리의 헌신은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할까요?
1. 첫째, 우리는 헌신할 때 계산을 초월해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여자는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붓습니다.
그때 그녀에게는 인간적인 계산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것보다 소중한 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소중하게 여기는 분은 자연히 계산을 초월하게 됩니다.
우리는 가끔 이런 이야기를 듣습니다.
"하나님은 물질과 능력을 동시에 주시지 않는 것 같다."
목회를 하다 보면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물질이 풍족한 곳에는 이상하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반면에 가난한 곳에는 오히려 더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우리 모두 헐벗고 굶주려 가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가난 속에 하나님의 능력이 임한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돈을 개입시키지 말라는 말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돈과 계산을 초월하지 않으면 신앙은 자라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인은 주님 앞에서 계산이 없었습니다.
그것을 극적으로 나타낸 장면이 바로 향유를 깨뜨린 장면입니다.
예수님에게 와서 향유만 부어도 충분할 텐데
굳이 옥합을 깨뜨려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 이유는 충분히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만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여자가 옥합을 깨뜨린 행위에는
주님을 사랑하는 최대의 헌신의 고백이 담겨 있다는 점입니다.
아마 이런 고백이 아닐까요?
"주님! 이 옥합은 당신만을 위해 쓰여지기를 원합니다."
아마 이런 고백도 있을 것입니다.
"주님! 이 옥합처럼 제가 주님 앞에 온전히 깨어지기를 원합니다.
또한 이런 고백도 그 행위에 담겨져 있을 것입니다.
"주님! 앞으로 돈에 연연하여 살지 않고 주님만을 위해 살겠습니다."
얼마나 소중한 여인입니까?
그러나 인간은 사람의 진실을 진실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가장 큰 이유는 시기와 질투 때문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곳에 있던 일부 사람들이 분노하며 말했습니다.
4절 말씀을 보십시오. "...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이 사람들은 정말 여인의 진실을 무참히 짓밟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래야 주님 앞에 헌신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달래고
자신의 양심에 위안거리로 삼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 나아가 가난한 자를 끌어들입니다. 5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그들이 정말 가난한 자들을 생각해서 그런 말을 했을까요?
말은 그럴듯하지만 그것도 자신의 양심의 위안을 위해서입니다.
오늘날 헌신하지 못하는 분들로 인한 가장 큰 문제가 이것입니다.
헌신하지 못하는 것 자체에는 오히려 문제가 크지 않습니다.
그러나 헌신하지 못하기 때문에 남의 헌신을 시기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양심의 위안을 위해 끊임없이 비판거리를 내세우는 것이 문제입니다.
헌신이란 하나님의 감동 주시면 하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헌신하지 못하는 성도를 포근하게 감싸 안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성도들도 헌신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지나치게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성도들은 남이 헌신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무슨 소리를 들을까봐
미리 비판거리를 내세워 자신을 방어할 필요가 없습니다.
헌신은 가장 적절한 때 하나님이 감동 주시는 대로 자연스럽게 하면 됩니다.
그리고 목회자도 억지로 헌신을 강요하여 부작용을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목사나 성도나 다 계산을 초월해야 합니다.
헌신하지 않는다고 목사가 성도를 속으로 욕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정말 그런 마음이 하나도 없습니다. .
헌신은 어차피 애정과 믿음의 표시이기 때문에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헌신한다고 성도끼리 서로 구별의식을 가져서도 안 됩니다.
헌신하는 사람은 우월감을 가져서는 안되고
헌신의 때가 이르지 못해서 헌신하지 못하는 사람도
그 헌신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지나치게 자존심 상하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더 나아가 상한 자존심을 억지 만회하기 위해서
다른 비난거리를 억지로 만들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2. 둘째, 우리는 헌신할 때 우리의 전부를 드려야 합니다.
이 여인은 향유를 드릴 때 조금도 남기지 않았다.
그 가치는 3백 데나리온의 가치였습니다. 노동자 300일 일당입니다.
주일과 공휴일을 뺀다고 하면 노동자 1년 치 월급입니다.
큰 액수입니다. 그러나 액수의 많음보다는
그것이 그녀의 전부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우리의 전부를 하나님 앞에 돌려 드려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전부를 드리라고 할 때 사람들은 깜짝 놀랄 것입니다.
그러나 전부를 드리라는 말에 너무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전부를 드리라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무엇을 드릴 때
일부를 드려도 전체를 드리는 심정으로 드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적선하듯이 드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모두 모아서 소중하게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십일조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얻은 모든 것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에
사실상 우리가 모든 것을 다 드려야 합니다.
그렇지만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위해서
9는 자신의 삶을 위해서 쓰고 1은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서 쓰라는 것이
바로 십일조의 참된 의미입니다.
그래서 1을 하나님께서 받으실 때 10을 다 받은 것으로 여겨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십일조를 드리면
그 십일조에는 우리의 모든 것을 드린다는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그처럼 우리는 전체를 드린다는 자세로 하나님께 헌신해야 합니다.
내가 이런 위치에 있으니까 이 정도는 해야지 하면 안됩니다.
헌신은 그러한 예의나 체면치레 이상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드리는 심정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3. 셋째, 헌신할 때 미루지 말아야 합니다.
이 장면 바로 이어서 곧 주님은 십자가를 지십니다.
어떻게 보면 이 땅에 계실 때의 주님을 위한 마지막 헌신의 기회입니다.
그러나 그 때가 마지막인줄은 그 장면에 있었던 어느 누구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오직 이 여인만이 주님의 삶의 마지막에 최선의 헌신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헌신이 마지막일수도 있다는 심정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헌신의 기회를 뒤로 미루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성령께서 어느 때 우리에게 헌신의 부담을 주십니다.
그 순간에 형편이 풀리면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물로 그때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진정한 헌신의 모습이
상당히 퇴색한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진정하고, 아름답고, 기억될 헌신이 소중한 헌신입니다.
형편이 풀린 다음에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헌신으로 보지 않고 적선으로 보면 어떻게 합니까?
어려운 대로 하나님이 주신 부담이 응하는 것이 소중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19장 39절을 보십시오.
니고데모가 주님 돌아가신 후 몰약과 침향 섞은 것 백 근을 가지고 옵니다.
그것도 물론 안 하는 것보다는 낫지만 돌아가신 다음에 가져오는 것보다는
이 여인의 모습이 더 소중하고 좋아 보이지 않습니까?
헌신의 기회를 잘 포착하는 것!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성령의 감동에 따라 헌신하며 살기를 힘쓰십시오.
어차피 우리가 이 땅에서 붙들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가지고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여러분! 주님을 위해 물질을 잘 쓸 수 있는 지혜를 구하시고,
최선의 헌신을 보여 주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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