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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박감의 좋은 점과 나쁜 점
2004-02-11 14:15:54   read : 798



내가 철이 들면서부터 내 곁을 떠나지 않고 줄 곳 따라다니는 끈질긴 친구 한 놈이 있다. 바로 강박감이란 이름의 친구이다. 어디서 왔는지 그 근원을 알지도 못하게 이 친구는 인사도 없이 슬쩍 내 옆에 다가왔었다. 처음에는 희미해서 때로는 그 존재가 잘 느껴지지도 않았다. 나도 대수롭지 않게 대하곤 했었다. 단지 좀 특이한 친구구나 하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친구는 훨씬 오래전부터 내 곁에 있었던 것 같았다. 단지 그땐 그것을 강박감이란 이름으로 불러주지 않았을 뿐인 것이 아닌가 싶다. 그것은 나의 유년시절부터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내 주변에 머물러 있었다. 예민했던 나는 그런 것들을 흘려버리지 않고 예민하게 받아들였고, 그것이 나에게 강박감이란 친구를 만들어준 힘인 것 같다.

유년주일학교에서는 어린 나에게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했었다. 착한 삶을 살지 않으면 지옥에 가고, 착하게 살면 천국에 간다고 배웠다. 그러나 무엇이 착한 삶인지는 가르쳐주지 않았다. 말을 잘 듣고 장난치지 않고 떠들거나 아이들과 싸우지 않는 것. 얌전하게 세상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것. 아마 그런 것들이 나를 옥죄어 오던 강박감의 내용들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얻은 지옥의 이미지와, 동네 뒤 사찰의 벽에 그려져 있던 지옥도. 그리고 사천왕의 무서운 얼굴. 그런 것들이 내 마음에 죽음이란 것에 대한 첫 모습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그리고 어릴 적 함께 살다시피 하셨던 외할머님이 바람이 몹시 부는 겨울밤에 들려주시곤 하셨던 귀신이야기 또한 ‘잘못이란 것을 해선 안 된다’는 강박관념의 원천이 되었는지 모른다.

왜 사람들은 ‘삶은 아름다운 것이다’‘삶을 만끽하면서 살아가거라’‘예수님은 착한 어린아이가 아니라 어린아이 자체를 사랑하신단다’ 이런 말들을 들려주지 않는 것일까. 가끔씩 그런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나 역시도 내 아이에게 ‘너는 아직도 그런 것도 모르니?’라는 식으로 은근한 강박감을 심어주는 것을 느낀다.

나 역시도 모르는 중에 그런 방법을 쓰고 있었다. 강박감은 우리의 삶을 통제하는 아주 효율적인 이데올로기적 도구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서.’ ‘먹고 살려면 할 수 없잖아요’. 그러나 실제로는 많은 사람들이 불안을 덜기위해서 무리한 일을 한다. 더 이상 이전투구에 뛰어들지 않아도 되는 데도 불구하고 더 많은 욕심을 낸다. 탐욕스러워서 그런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중에 많은 사람들은 아마도 자신의 속에 있는 불안을 이기지 못해서 일 것이다. 나 자신이 그랬다. 조용한 오후, 멍하니 있노라면 어디선가 저공비행으로 날아오는 여름날의 모기처럼 어디선가 갑자기 가슴 답답함이 느껴져 오곤 했다. 무시무시하던 지옥도를 바라보던 어린시절에 느끼던 것과 비슷한 두려움이 느껴져 오곤 했었다.

나는 다시 책을 찾아들고 하염없이 글들을 읽었다. 주말의 한가로움은 나에게 불안의 근원이었다. ‘노이로제는 천재를 낳는다.’ 프로이드는 그런 말을 했었다. 아마도 그 말은 사실일 것이다. 갈등은 끊임없이 사람의 뒤를 쫓는 사냥개와 같다. 잠시 방심하고 있으면 언제 그 무서운 맹견에게 물려갈지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우리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받는 부담은 학력, 재력, 권력 그런 것들일 것이다. 무엇을 얼마나 소유하고 있는가에 관해. 아마도 누가 얼마나 보람된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가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는다. 그건 그저 신문의 미담란에 등장하거나 가십거리로 취급될 뿐이다.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며 때로 눈물을 훌쩍거리는 사람도, 그런 삶이 사회의 주류적 행동양식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저 ‘그런 사람이 있기에 세상은 살아갈만하다.’고 느낄 뿐이다.

왜 그들은 세상을 바꾸어 보려고 하지 않을까. 나는 그 이유를 안다. 그건 바로 강박감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우리의 뇌리에 깊이 뿌리박힌 그 강박감은 우리에게 열심히 살아가라고 가르친다. 더 열심히 공부하고, 더 좋은 학교에 가고, 더 출세하고, 더 많은 돈을 벌고, 그래서 더 많이 즐기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그렇게 착하게 산 사람들은 결코 세상을 움직일만한 위치에 오르지 못한다. 정치인들의 이력을 보라. 거의가 전과자이고 거의가 협잡배이다. 정치적 소신도 신념도 없이 오로지 이해관계에 따라 옮겨 다닌다. 그러나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그런 사람들이다. 그런 이들은 도대체 어떤 교육을 받고 자라났을까. 남을 공격하라고, 남에게 뒤집어 씌우라고, 더 많이 소유하라고, 그렇지 않으면 결국 패배자가 되고 만다고 배우며 자랐을까?

나는 아이에게 반항할 것을 가르치고 싶다. 세상을 사랑하라고. 세상이 얼마나 사랑스러운 것인지를 깊이 느껴보라고. 그리고 그 세상의 평화로움을 방해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반항하라고. 그것이야말로 세상을 보람되게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내 아이들에게 그리고 내 글을 읽을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에게 나는 그렇게 이야기하고 싶다. 이 글을 쓰는 내 가슴엔 뜨거운 사랑이 없다. 단지 의무가 있을 뿐이다.

난 나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한다. 그런데 어떻게 세상을 긍정하고 사람들을 사랑한단 말인가. 나에게 삶은 끊임없는 시험과 같다. 나는 아직도 스스로 택한 삶을 향해 달리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서 무엇을 하고 살아야 '벌을 받지 않을까' 생각하며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다.

나도 감동할 때가 있다. 바보같이 나는 아직도 눈물을 잘 흘린다. 영화를 보면서도, 아름다운 장면을 보면서도. 장엄한 일몰이나 아름다운 자연 앞에서, 슬픈 조락을 지켜보면서, 차가운 겨울 거리를 홀로 거닐면서. 그러면서도 나는 강박감에 시달린다. 이 아름다운 장면을 보면서, 이 슬픔에 접하면서 내 가슴은 지금도 왜 이렇게 차가운 것인가 라고.

내 눈에는 늘 이 땅의 슬픔들이 가득히 보인다. 무표정한 그들의 얼굴에 슬픔이 숨겨진 것인지, 실제론 슬프지 않은 그들의 얼굴에서 괜히 슬픔을 찾아내는 강박감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삶 한가운데로 달려갈 용기가 없다. 다만 그들의 삶의 변두리를 맴돌 뿐이다. 그리고 늘 그들의 삶을 지켜본다. 이제 이곳을 떠나야겠다고 하면서 쉬 떠나지를 못한다. 그것도 강박감일까. 어쩌면 그것만은 내 가슴에서 우러나는 진정한 느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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