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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보기도
2004-02-03 10:09:50   read : 769

저는 하늘나라 상급의 대부분은 바로 중보자들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나라에 헌신된자들임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그런면에서 중보기도야말로 가장 희생적인 행위요 가장 고상하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적인 이기심과 자신을 드러내는 마음으로 봉사도 하고 설교도 하고 전도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중보기도입니다. 중보기도는 진정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에 헌신되어 있는 정도를 보여주는 척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 상급의 메달은 대부분중보기도자들의 차지일 것이라고 봅니다.

찰스 스펄전은 이렇게 말합니다. "중보기도가 할수 없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개인의 중보기도도 능력이 있지만 교회가 연합하여 하는 중보기도 사역은 더욱 놀라운 역사가 일아납니다. 평안 교회 젊은이들이 이 중보기도에 힘을 모은다면 이 나라와 공동체의 운명이 바뀔 수 있습니다.

21세기의 새로운 사명과 비젼을 위해 우리에게는 젊은 중보기도 용사들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금번 젊은 이 중보기도학교를 통해서 사랑의 교회와 수양관, 그리고 각 처소에서 기도의 불길이 일어, 어두워진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만민이 목도하게될 것입니다. 성령의 은혜가 충만한 중보기도학교에 젊은이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중보기도는 통치의 특권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으로 일하시게 하는 방법이요, 교회가 가진 최고의 자산입니다.. 유럽이 정치적 도덕적, 영적으로 어둠에 가라앉아 있었을 때 모라비안 교도남녀 각각 24명이 체인기도를 시작했고 이것은 100년간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유럽에 부흥을 가져온 불씨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위대한 기도의 핵심은 바로 중보 기도에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의 골방에서 조차도 이기적인 간구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보기도는 우리의 이기심이 설 수 없는 가장 고상한 형태의 기도로서 하나님의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사람들이 실천해온 아름다운 덕목입니다.. 앞으로 몇주간 함께 나눌 중보기도에 있어서 먼저 기억해야하는 것이 중보기도의 통치권과 특권의식입니다..

기도가 성도의 특권이라고 종종 말하면서도 기도하는 자에게 겸손함이 없고 황송함이 없는 것이 의아합니다. 기도를 조금하면서 세상의 가장 큰 십자가를 지고 엄청난 고행이라도 수행하듯 보인다면 그런 사람을 보는 순간에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질 것입니다.. 중보기도는 그렇게 재미없는 일이 아닙다. 웨슬리 듀엘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은 중보기도로 세계를 통치하신다.”고 말하였습다. 우리는 기도에 대해서 약한 피조물의 탄원이란 이미지를 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마치 주님의 기도 역시 아버지 하나님을 향한 탄원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중보기도는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통치자의 의논이요 경영이요 통치의 행위인 것입니다.. 주님 보좌 우편에 앉으시고 그 발등상으로 만물을 밟고 계신다는 것은 그분이 통치자라는 뜻이며(빌2;9-11), 그분의 기도는 통치의 수단인 것입니다..

이러한 통치권은 저절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만물을 다스릴 왕이 되셨고 그 고난 속에서 순종함으로 만유를 위한 대제사장으로서의 자격을 얻으신 것입니다.(빌2:6-11,히5:7-10). 그러므로 이 통치권은 오직 우리 주님만의 특별한 권리인 것입니다.. 주님외엔 아무에게도 권리가 없다. 이 세상의 어떠한 신을 향한 기도와 인간들의 소망은 헛됨이 그러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다른 사람이나, 대통령을 위해서, 국정을 위해서 기도할 때 무슨 권리로 그 국정이나 인생에 개입하며 소원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만한 자격을 따지자면 아무 권리가 없습니다. 심지어 자녀를 위한 기도조차 할 권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은 모든 것의 주인이신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중보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인가요? 그것은 통치자이신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중보기도의 특권을 나누어 주셨기 때문입니다..(요14:12,딤전2:1-2) 통치자 자신의 이름을 우리에게 백지수표로 위임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구하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중보기도는 주님의 통치권에 함께 동참하는 일입니다. 중보기도는 장차 세상을 다스리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이 땅에서의 연습입니다.(창18장) 성도들은 중보 기도로서 이미 왕노릇을 시작하고 있으며 이 중보기도를 통해서 세상을 바꾸고 다스릴 수 있습니다. 중보기도는 재미없는 고행이나 십자가가 아니라 신나는 경험입니다.. 우리의 중보 기도모임은 세계경영의 회의장이며 우리의 중보기도실은 바로 만왕의 왕과 함께 다스리는 세계 통치, 곧 세계경영 집무실입니다..

중보기도는 통치의 특권입니다.(2)

간구와 기도와 감사가 모두 중보기도 입니다.

우리가 중보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주님이 지상에서의 사역을 마치고 하나님 아버지에게 가셔서 천상 사역을 시작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즉 우리 주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만민의 주로 등극하시고 나서(행2:34-36) 우리에게 자신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중보기도의 시작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중보기도를 하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중보기도 사역이 우리에게는 특권이 되는 것입니다. 중보기도는 우리를 바로 통치의 자리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보기도의 중요성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중보기도의 중요성에 대해서 잘 말씀하고 있는 성경은 딤전 2:1-8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 가운데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가 모두 다 중보기도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개 이 중에서 도고만이 중보기도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하는 기도라는 측면에서 모두가 중보기도입니다. 그런데 이 딤전 2:1-8절까지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몇 가지 중보기도가 갖는 중요한 우선성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볼 수 있는 것은 중보기도가 갖는 목회적 우선성입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것처럼 디모데전서 1장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교회 안에 있는 거짓된 율법교사를 경계하며 그가 어떻게 복음의 참된 교사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것인가를 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2장에 와서 비로소 목회에서 중요한 여러가지를 가르치는데 바울이 제일 먼저 권하는 것이 바로 중보기도입니다. 이것은 바로 목회에서 무엇을 우선 순위로 두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두번째로는 중보기도가 갖는 신학적인 우선성입니다. 이 신학적인 우선성은 하나님에 대한 것과 예수님에 대한 것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3-6절에서는 우리가 중보기도를 하는 이유에 대해서 그것은 다름이 아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잘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며 모르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에 대한 신학적인 우선성은 우리 주님이 모든 사람을 위해서 십자가로 속전을 지불하시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해야 할 중요한 신학적인 이유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십자가를 십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 역시 중보자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근거해서 사도 바울은 7절에서 자신이 이방인들을 위한 중보의 사도로 세움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8절에서 그런 나의 사역을 위해서 중보기도로써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사도 바울은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이방인 전도를 위해 주님이 교회에 세운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선교', 다른 말로 전도요 또 하나는 '중보기도'라는 것입니다.

중보기도는 기본 사역입니다

- 예수님의 사역과 기도의 관계
마가복음 1장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의 하루 일과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예수님의 하루 일과가 여기에 쓰여져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여기 막 1장에 쓰여져 있는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예수님의 일상적인 삶의 패턴이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 같습니다. 즉 예수님의 하루 일과는 비유컨대 아침 일찍 일어나셔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심방하시고, 그리고 저녁에 신유 집회를 하시고 밤늦게 주무시는 생활이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바쁜 일과 가운데서도 우리가 주목해서 보아야 하는 것은 막 1:35 나타난 새벽 미명에 일어나셔서 한적한 곳에 나가셔서 기도하셨다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보통 예수님의 3대 사역 즉, 가르치시고(teaching) 전파하시고(preaching) 고치시는(healing) 것만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에 기도(praying)가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이 기도는 가장 중요한 사역으로서 주님의 사역 중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기본사역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전파하시고 고치시는 이 3가지의 사역을 제대로 하시기 위해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덧입는 이러한 기도가 꼭 필요하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그러한 능력 덧입기를 간구하시는 기도와 더불어 그 날 만나서 가르치실 사람들에 대해서나 병을 고쳐주실 사람들에 대해서도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에게 중보기도를 드리셨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포함해서 예수님의 4대 사역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예수님의 기도사역을 통해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중보기도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에 중보기도의 중요한 측면을 존재론적인 우선성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딤전 2:8-15을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딤전 2:8-15절을 살펴보려고 할 때 우리는 그 해석의 열쇠를 어디서 찾아야 될까요? 저는 그것을 창조질서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딤전 2:8-15절이 창조질서 상 여자에게 순종할 것을 명하고 있다면, 역시 창조질서 상 남자에게는 여자를 대표하고 교회를 대표하는 사역을 감당하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다름 아닌 제사장적 사역입니다. 그리고 그 제사장의 가장 중요한 사역이 기도입니다. 그래서 딤전 2:8절에 남자들에게 기도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가정의 대표는 분명히 남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남자에게 대표성을 주신 것은 단순히 남자의 권위만을 내세우라고 주신 것이 아니고, 한 가정의 대표인 남자가 대표성을 띠고 하나님과 대면할 기도의 자리로 나오라고 주신, 통치권으로의 초대와 같습니다. 이것을 인식한다면 가장으로서 남자들이 해야 할 일이 분명해 집니다. 그것은 자기 가정을 위해 중보기도하는 것입니다.

중보기도는 가장의 통치권 행사

중보기도는 단순한 탄원의 기도와는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통치권의 행사입니다. 그런데 통치라는 것은 높은 자가 낮은 자를 통치하는 것입니다. 낮은 자가 높은 자를 통치하는 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가정의 대표인 남자가 가정의 높은 위치에서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라고 남자에게 기도의 우선 순위를 부여하신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한 가정을 통해 어떤 일을 이루시려고 하는데 누구와 의논해서 이 일을 하시겠습니까? 당연히 그 가정의 우두머리와 의논하시지 않겠습니까? 우두머리를 제쳐두고 존재론적 의미에서의 가정의 2인자나 혹은 자식과 상의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두머리가 누구입니까? 바로 가정의 대표인 남자입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질서에 하나님께서는 매우 예민하십니다.

남자가 하나님 앞에서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내 가정을 어떻게 통치해 나갈까 의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과 의논하는 일을 오늘날 남자들이 바쁘다는 핑계로 여자들에게 다 떠 넘겼습니다. 여자들이 하는 일은 기도하는 일이고 남자들은 밖에서 일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굉장히 잘못된 생각입니다. 성경에서는 남자에게 가정을 위한 기도 책임이 있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내에게 가정의 기도 문제를 떠넘기는 남편은 가정의 통치권과 제사장적인 사역을,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먹은 에서와 같이, 팔아 넘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절대로 아내에게 기도 책임을 떠넘기지 않습니다.

우리는 늘상 ‘기도의 어머니’라고 말하고 있는데 성경 어디에 ‘기도의 어머니’가 그렇게 많이 나옵니까? 예, 물론 한나, 마리아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보다 훨씬 많이 기도의 사람 아브라함, 중보기도의 사람 모세, 사무엘, 다윗, 다니엘, 바울 등이 나오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기도했다고 하면 다 남자입니다. 단적으로 예수님의 열두 제자도 다 남자였습니다. 그런데 맨날 교회에서는 ‘기도의 어머니’라는 말만 합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아무래도 교회에 여자 성도의 비율이 높아서 생긴 말이 아닌가 합니다. 기도에 대해서 듣는 분들이 다 여자분들이니까 ‘기도의 어머니’라는 말이 나온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남자들에게 일차적으로 기도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저는 매일 제 아이들의 머리에 손 얹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제 아내의 머리에도 손을 얹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제 딸아이가 나중에 시집갈 때 제 사위에게 제 딸아이와 함께 이 기도권도 건네주려고 합니다.

그러면 어머니, 여자의 임무는 무엇입니까? 성경에서는 남자에게 가정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과 비교해서 여자에게는 말씀을 맡겼습니다. 마리아는 눅 2:19에서 천사의 말을 마음에 지키어 생각했으며 또 2:51에서도 예수님이 12살 때 했던 모든 말을 마음에 두었다고 표현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장의 이 부분은 마리아가 아이에 대해서 태몽을 마음에 품거나 아이에 대한 인간적인 마음을 마음에 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이 아이에 대해서 무엇이라 말하는가를 마음에 품고 그 말씀을 따라 양육하는 엄마의 책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실 말씀으로 양육하고 가르치려면 오랜 시간을 붙어 있어야 하고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내야 합니다. 말씀으로 양육한다는 것은 가치관을 변화시키는 일이기 때문에 엄마가 아이들을 말씀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즉 말씀으로 양육하는 일, 말씀으로 변화시키는 일은 엄마의 역할입니다.

중보기도자는 바로 당신이어야

중보기도자 한 사람으로 결정되는 한 민족의 운명.
중보기도의 의무에 대해서 그 중요성을 잘 나타난 곳이 에스겔서 22장 30절 말씀입니다.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나로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서 찾다가 얻지 못한 고로”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이스라엘 백성이 산 밑에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자신들을 애굽의 노예에서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을 배반하였던 사건을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때 모세가 한 행동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기 백성을 위한 중보기도였습니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 32:32)

이러한 모세의 중보기도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가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처음에 읽었던 에스겔 22장의 정황은 출애굽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과 동일합니다. 즉,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2차 포로로 잡혀가지의 직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하나님의 언약을 범한 징벌 받기 마땅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에스겔 22장 30절에 보니까 하나님께서 누구를 찾지 못했다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것은 자기 백성을 위해 중보기도할 자를 찾지 못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31절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내가 내 분으로 그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이 당신의 분으로 이스라엘 백성 머리 위에 쏟아서 그들을 멸망시키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중보기도자 한 사람에 의해서 한 민족의 운명이 달렸다는 것입니다. 중보기도자가 있는냐 없느냐에 따라서 그들의 삶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보기도의 중요한 의무를 우리에게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 가정이 정말 멸망당할 마땅한 죄를 범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정을 위해서 중보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가정은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보하는 사람이 없으면 그 가정과 중보 받지 못한 사람은 멸망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 주위에 한 가정이 망하고 한 사람이 망했다면 그 가정과 그 사람은 왜 망했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분명 그 가정에 그 사람에게 중보자가 없었기 때문에 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우리의 두려움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가까이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그 멸망한 가정과 사람의 피값을 찾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3장 16절부터 21절까지를 읽어보십시오. 거기에 하나님의 경고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중보자의 역할

중보자의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임니다.
그러면 이렇게 중요한 위치에 있는 중보 기도자는 누구이겠습니까?
첫째로 이런 중보자는 하나님의 속마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기껏 멸망시키겠다고 말씀하시고는 누구를 찾으시냐면 나를 막아서서 이 땅을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처음부터 하나님이 멸망시키시지 않으면 되지, 왜 당신이 멸망시키러 오시고서는 당신을 막을 사람을 찾으십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이 중보자를 찾는 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다른 말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멸망시키고 싶지 않다는 표현에 다름 아닌 것입니다.


제가 어느 날 제 딸아이가 말을 안들어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서 매를 들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몇 대를 때렸을 때, 제 딸아이가 “아버지 용서해 주세요"하고 용서를 빌면 제가 그만 용서해 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이를 악물고 버티는 것입니다. 그러자 제가 곤란해졌습니다. 왜냐하면 이 아이를 더 때리면 아이가 아주 ‘박살(?)'날 것 같은데 여기서 멈추자니 아버지의 권위와 위신이 말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고 더 때릴 수도 없고 제가 아주 진퇴양란에 빠졌습니다. 그럴 때 제가 누구를 찾겠습니까? 그 순간에 제가 속으로 제 아내를 간절히 찾았습니다.

“여보! 빨리 와서 나 좀 도와줘!" 그때 마침 제 아내가 와서 아이를 감싸 안으며 “여보 한번만 용서해주세요. 우리 수아가 잘못했어요"라고 중보자의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그때 제가 못이기는 척 하면서 딱 물러나면, 딸아이에 대한 나의 권위도 살고 나의 사랑도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거기서 중보자가 없으면 제 딸아이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냥 그 자리에서 ‘박살(?)'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것이 중보자입니다. 그러니까 중보자는 때와 시간을 알고 하나님의 마음에 맞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모세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이스라엘의 범죄한 것을 용서해 달라고 중보할 때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 32:32)라고 말하면서 기도하였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모세는 하나님의 이런 깊은 속 마음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 기도를 드릴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이렇게 기도했을 때 정말로 생명 책에서 모세의 이름을 지워버리실 분이었다면 모세가 정말로 이렇게 기도했을까요? 아마도 이런 식의 기도는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멸망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아무리 악한 죄인이라고 하더라도 멸망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에스겔 33장 11절을 보시겠습니다. 거기서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하나님은 악인이 죽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중보자를 찾으시는 것입니다. ‘내가 악인을 징벌하기 위해서 나오지만 나의 진정한 마음을 알고 누군가 대신 기도할 사람을 보내라 그런 사람만 있다면 이 백성을 용서하겠다’ 고 밀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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